읽는 즐거움

황정은 연작소설 연년세세: 수많은 무명과 사랑의 마음

안다™ 2022. 2. 21.

연년세세: 아프지만 계속 이어져가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 곁의 수많은 무명, 1946년생 순자의 파란만장 일대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황정은의 연년세세는 세 모녀의 이야기를 그린 연작소설입니다.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이순일과 그의 두 딸 한영진과 한세진의 삶이 시대의 그림자와 교차되는 가운데, 그래도 이어져가야할 소설 속 주인공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한편으론 황정은의 소설을 읽으면 무엇인가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무거워집니다. 너무 슬퍼기도 한 데다가 그 이야기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더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2005년부터 작품 활동을 해온 황정은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작가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 <디디의 우산>은 2019년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 뽑혔는데, <연년세세> 또한 2020년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되었습니다.

 

연년세세는 여러 해를 거듭하여 계속 이어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대대손손이 있는데, 황정은 작가는 대대손손이 어감이 좋지 않고 뜻도 마뜩지 않아 연년세세를 제목을 삼았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연년세세라는 어감에 끌려 이 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뭔가 끊어지지 않고, 단절되지 않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묻어 있는 연년세세, 그러면서도 가부장적인 것은 이제 그만 끊어내고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묻어 있는 연년세세.

 

소설가 황정은

작가 황정은은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더」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 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 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연년세세』 등을 썼다.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대산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젊은 작가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 출판사 소개

 

연년세세, 창비, 2020년.

목차와 수록작품 발표 지면

파묘破墓
하고 싶은 말
무명無名
다가오는 것들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파묘 --- <창작과 비평> 2019년 봄호
 하고 싶은 말 ---- <자음과모음> 2019년 가을호
 무명 --- 미발표작
 다가오는 것들 --- 미발표작

 

연년세세 등장인물과 줄거리

등장인물

주인공 이순일 

이순일은 1946년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백부의 권유로 위원장이 되었고 유엔군이 다시 마을을 탈환했을 때, 역시 백부의 권유로 자수하러 갔다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때 백부는 월북했습니다.

 

이순일은 외조부에게 맡겨졌다가 열다섯 되던 해 고모를 따라 김포군 송정리로 가 고모네 댁에서 살게 됩니다.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그들의 일곱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열다섯 살 난 순자가 다 감당한 것입니다. 고달픈 순자의 이야기를 작가는 덤덤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빨래를 하고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며 고모네 아이들을 돌보았다. 열 사람 살림에 물이 늘 부족했다.
(···) 소마당에서 서남쪽으로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물을 퍼내는 집이 수십이라 그 우물엔 물 고일 틈이 없었다.
(···) 이순일이 집안일을 하다가 조금만 늦어도 수위가 흙바닥에 닿아 있었다. 이순일은 몇 차례 헛수고를 한 뒤에 새벽 세시쯤 물을 길으러 다녔다.
(···) 도르래도 없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물을 담아 올리고 통에 붓기를 반복하다가 무거운 물통을 들고 돌아가는 길을 다섯 번 반복하고 나면 팔이 저리고 옷이 젖고 잠이 쏟아져 더는 할 수 없었다. 학교 다니는 첫째와 둘째 사촌이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면 저녁에 설거지할 물이 부족했다.

 

1967년, 이순일은 몰래 집을 나와 남대문까지 걸어가 개인병원에 취직을 합니다. 주사를 놓기도 하고 폐기물을 소각하고, 시트를 세탁하고, 병원 바닥을 닦는 일을 했습니다. 독일에서 한국인 간호사를 뽑는다는 소문을 듣고 영어도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반년 정도 지나 고모부에게 다시 잡혀 갑니다. 더는 고모 가족과 같이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이순일은 시장 상인의 소개로 전쟁고아였던 한중언과 급히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전쟁 고아였던 한중언은 연고자가 없고 가진 것도 없었으나 한자를 비롯해 글을 알았고 잘 웃었고 근면했습니다. 그게 이순일이 결혼했던 이유 전부였습니다. 

 

한중언과 결혼하여 영진과 세진을 낳았습니다. 이순일 내외는 나이 들어 한영진과 김원상의 집에서 그릇을 닦고 아이들 장난감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바닥을 닦고 빨래를 널고 그들의 살림을 돌보고 그들이 먹을 반찬과 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일의 대가로 한영진 부부는 늙은 부부가 살도록 아래층을 내주고 생활비를 댑니다.

 

한영진

이순일의 첫째 딸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통업체에 취직하여 가족의 생활비를 댔습니다. 이순일은 가족의 대소사를 남편 한중언이 아닌 한영진과 의논했습니다.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한중언은 계주가 사기를 치고 도주하는 바람에 가계가 몰락하고 술주정꾼이 되었습니다.

 

동생들도 한영진과 의논했고, 한영진은 동생들의 대학 학비를 보태고 막내 한만수의 뉴질랜드 유학비도 댔습니다. 김원상과 결혼하여 예범과 예빈을 낳고, 최근 몇 년 동안엔 백화점에서 침구를 파는 유능한 판매원이 되었습니다. 

 

한영진은 자기 집 건물의 세입자를 내보내고 한중언과 이순일 노부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한영진은 친정 식구들에게 데면데면한 남편을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다만,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습니다. 한영진에게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습니다. 소설 <연년세세> 빛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한세진

이순일의 둘째 딸로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저런 직장을 거쳐가며 희곡과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소설 후반부에 뉴욕 북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합니다. 동성 하미영과 동거하고 있습니다.

 

한세진은 민통선 너머에 있는 외증조부 성묘를 매년 이순일과 함께 갑니다. 한영진과 한중언은 거기 뭐가 있다고 매년 기를 쓰고 가느냐는 입장이었고, 막내인 한만수는 너무 어렸기 때문입니다.

 

윤부경

이순일의 어머니의 동생. 피난길에서 만난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 아들 '노먼 카일리'를 낳고, '노먼 카일리'는 딸 '제이미'를 낳았습니다.

 

윤부경과 이순일은 1987년 덕수궁 돌담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때 동행한 노먼과 한세진도 처음 만나게 됩니다. 후에 한세진은 뉴욕 퀸즈에서 노먼의 딸 제이미를 만나게 됩니다.

 

소설 속 문장들

줄거리

연년세세의 단편 <파묘>는 한세진이 이순일과 함께 외증조부 파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이순일이 나이가 들어 더는 할아버지 성묘를 다닐 수 없기 때문에 파묘를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이순일의 그 까마득한 심정이 묻어납니다. 지난 세대의 이러한 의식을 믿지 않지만 묵묵하게 이순일을 동행하는 한세진의 마음도 헤아려지는 단편입니다.

 

단편 <하고 싶은 말>은 한영진의 입장에서 여성의 삶이 기술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장녀. 한영진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연년세세 이어져 오는 모성이라는 걸 깨우쳐 갑니다.

 

단편 <무명>은 이순일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압축합니다. 작가의 말에서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무명'은 1946년생 순자 씨의 피란 이야기를 듣고 썼다."고 황정은은 말합니다. 

 

등장인물에서 간략하게 소개했듯 순자, 그러니까 이순일의 삶은 형언하기 힘든 면이 많습니다. 작가는 그것을 '무명'이라고만 이름 붙였습니다.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할 순자의 삶을 작가 황정은은 아래 글로 마무리합니다. 작가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단편 <다가오는 것들>은 미아 한센뢰베의 동명의 영화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한세진이 하미영과의 동거생활과 뉴욕 퀸스에서 노먼의 딸 제이미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립니다. 

 

그리고 한세진은 영화 <다가오는 것들>와 하미영을 생각하며 연작소설은 끝납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다가오니까, 하고 하미영은 말했다.

 

연작 소설 연년세세의 마지막 문장은 순자의 삶을 요약하고 우리 모두의 삶을 압축합니다. 무엇인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갑니다. 바쁘게. 아니 아주 바쁘게. 그리고 다가옵니다. 설령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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