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즐거움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에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까지

안다™ 2021. 7. 21.

▶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는 박노해 시인

▶ 얼굴 없는 시인에서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사진작가로 

 

박노해 시인의 시를 좋아합니다. 문학, 특히 시에 대하여는 문외한이지만 아프고 지칠 때 힘이 되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는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희망을 줍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박노해 시인의 시가 그렇습니다.

 

청춘기, 노동의 새벽을 여는 시인의 시들에 독한 소주로 숱한 밤들을 보냈지만 지금은 개인을 노래하는 우리 곁의 시인의 시들이 더 좋습니다. 혁명가보다 소시민이, 대의명분보다는 아주 조그만 소리가, 투쟁의 노래보다는 '꽃피는 말'이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들이 더 좋습니다. 

 

꽃피는 말
-박노해-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박노해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수록 시

 

박노해의 옥중 에세이집

박노해 시인 프로필

노동자의 새벽을 연 시인 박노해는 1957년 11월 20일 전남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에서 따온 것으로 본명은 기평입니다. 개명을 통해 필명을 본명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박정묵은 약장사 행상을 하며 목포에서 남로당 활동을 하였고 여순반란 사건 때 주동자급으로 빨치산 투쟁을 하다 생을 마감하였다고 박노해 시인은 술회했습니다.

 

노동자의 삶과 문단 데뷔

1977년,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박노해 시인은 철강공장, 섬유공장, 청량리 공사판 등에서 노동자로 전전하면서 1983년 <시와 경제> 동인지 2집에 '시다의 꿈', '그리움', '봄'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여 얼굴 없는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판되자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이 시집을 금서로 지정하였으나 <노동자의 새벽>은 100만 부가 팔리며 1980년대를 용광로처럼 끓게 만든 '뜨거운 상징'이 되었습니다.

 

암울한 노동의 현장에서 뽑아 올린 박노해의 강렬한 시어들은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노동자는 물론, 문단과 지식인 계층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비로소 우리 문학계에도 노동자에 의해 노동자의 삶을 노래하는 노동문학이 탄생했던 것이지요.

 

노동의 새벽

- 박노해 -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 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친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잔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사회주의노동자 운동 혁명투사

박노해 시인은 1985년 노동자들의 정치조직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심상정, 김문수 등과 함께 창립하였고, 1987년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989년에는 지하조직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농맹)을 결성해 급진적인 사회주의 혁명투쟁을 주도하였고, 1991년 3월 10일 안기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수감생을 하던 중, 1998년이 되어서야 김대중 대통령의 광복절 특사로 7년 6개월 만에 풀려났습니다. 수감 중에 이른바 '준법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일부 세력들은 그에게 변절자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시인은 스스로를 '실패한 혁명가'로 규정했습니다. 석방된 이후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록 콘서트 현장에도 얼굴을 보였습니다. 

 

수감 생활중에 '반입 도서 리스트가 1만 권'에 달했을 만큼 독서광이었던 박노해 시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이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박노해 시인이 석방 후 첫 출간 에세이집 <오늘은 다르게>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내 한 몸 바치는 것을 미덕으로 교육받아온 '개인 없는 우리'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 '개인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박노해, '인다라의 구슬',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는 깨달음을 우리들에게 전했습니다.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와 출소 이후 박노해 시인의 활동들을 두고 변절이다, 배신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세력도 있지만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는 시인의 삶에 대한 자세는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시인 박노해에게 이제 '사람만이 희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수록 시

 

박노해 시인의 인생 2막

시인 박노해는 반전평화운동가로서, 사진작가로서 다채로운 인생 2막을 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에서 '길이 끝나면'을 첫 시로 실었습니다.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 시인은 정직한 절망으로 희망의 시작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중동평화활동을 모은 첫 사진전 <라 광야>(2010) 전시전부터 박노해 신드롬을 일으킨 사진전 <다른 길>(2014)을 거쳐 박노해 상설 사진전을 열어오고 있습니다. 

 

박노해 사진전 '사이좋은 형제' 

사이좋은 형제 /박노해

두 아이가 길을 간다.
보고 또 봐도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작은 새처럼 지저귀며 생기 차게 걸어간다.
총성이 울리는 위험 가득한 길이지만
이 길에서는 내가 널 지켜주겠다는 듯
두 살 많은 아이는 동생의 어깨를 감싼다.
혼자서는 갈 수 없다. 웃으며 가는 길이라도.
함께라면 갈 수 있다. 눈물로 가는 길이라도.

사진 에세이 <길> 수록 시

 

박노해 사진 에세이 시리즈 세번째 <길>(2020)

그리고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않는다>를 자주 펼쳐봅니다. 시인이 10여 년 동안 써온 5천여 편의 시 중에서 300편을 묶은 시집입니다.

 

이제 나의 하늘을 보면서 국경을 넘나들며 하루도 시를 쓰지 않았던 날이 없었던 시인의 시들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새로운 길을 노래하는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래 사라지지 말아라>의 표제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부분